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2013 교학사 한국사 교과서 사태 (문단 편집) === 선사시대 ~ 조선후기 === >이러한 획기적 변화(농경의 시작)는 서아시아 지방을 비롯하여 '''아시아 여러지역에서''' 기원전 8000년 경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세계 각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 기원전 8000년에 농경이 시작된 것은 메소포타미아 문명 한정이었다. >한반도와 중국동북지방에 거주하던 여러집단이 공동체로 조직화 되고 '''황허문명의 확장에 따른 문화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기원전 1천년 동안 한반도와 그 주변지역에서 민족의 원형이 성립되기 시작하였다. → 한민족 형성과정의 중간에 황허문명의 확장을 집어넣어서 의미를 뒤틀어버렸다. 저 내용대로라면 한민족은 황허문명권에 속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이건 청동기 발달사만으로도 납득불가능한 소리가 된다. 한민족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더 연구할 필요가 있지만, 보통 정설로는 '신석기 시대 시작부터 한반도 원주민과 이북 이민족의 유입으로 형성'[* 민무늬 토기에서 빗살무늬 토기로의 변화는 이런 이민족의 유입을 보여준다. 「한국사통론」참고]되었다고 본다. 그리고 중국사의 입장에서보면, 황하문명이란 학설은 이미 1970년대부터 고고학적 성과로 인해 비판받은 학설이다. 장강이나 요하 일대의 신석기 유적이나 유물들이 발견되면서 황하와는 다른 수준 높은 문명이 있었던 것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황하 지역에서는 움집 단계의 가옥이 발견되는 반면에 장강 지역에서는 아예 건축을 하여 지상 가옥이 발견되는 사례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황하만이 인류가 발전하던 곳이 아니고 다양한 지역에서 인류가 문명을 구축해나가고 있었음이 밝혀져서 중국 학계에서는 황하가 아닌 중국 문명으로 표기하는 추세이며 황하 문명이라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삼국유사(1281년) →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는 1281~1283년 사이에 완성되었을 것이란 추정만 가능할 뿐, 1281년으로 단정 지을수는 알 수 없다. >부여는 산과 언덕 넓은 강물이 많아서, '''한반도 지역'''에서는 가장 넓고 평탄하였으며 → 22페이지의 서술. [[부여]]의 위치가 넓고 평탄한 지역인 것은 맞지만 '''그곳은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이다.''' --[[부여군|충청남도에 있는 곳]]을 얘기하는 거라면 맞긴 하다.-- --사실 이것도 틀리다.-- 더구나 산과 언덕이 많은데 넓고 평탄하다는 서술은 '''단순한 사실 오류'''마저 포함하고 있다. 최종 수정본--이라고 맨 위에 제시된 링크--에서는 '한반도 지역에서는'이라는 표현이 삭제 되며 수정. > 그 후 고구려는 활발한 정복사업을 벌였고, 한군현을 공략하여 313년 경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하고, 요동지방으로 진출하였다. 옥저를 정복하여 공물을 받는 등 동쪽으로도 정복사업을 벌여나갔다. → [[태조왕]] 시기에 옥저와 동예를 정복하였고, [[미천왕]] 시기에 낙랑과 대방을 정복한다. 여기에는 거의 200년의 시간차이가 있고 옥저의 정복이 더 이르다. > "고구려 건국 초기에 [[연맹 국가]] 형성에 참여한 5개의 [[부족]]으로..." "[[거서간]] - [[혁거세]] - [[족장]]" → 고구려의 5부와 신라의 6부는 부족이 아니다. 이미 40년전의 학설인 폐기된 이론을 그대로 싣고 있다. > ([[안시성 전투]]) "[[양만춘]] 장군을 중심으로 군민이 합심하여" → 양만춘이란 이름은 후대(조선시대)의 첨부이며, 당시 안시성 성주의 진짜 이름은 알 수 없다. [[안시성주#s-4.1]]문서의 4.1문단 참조. >신라하대에는 최치원을 포함한 6두품 출신의 유학자들을 중심으로 골품제를 비판하고 중앙집권적인 유교 정치 이념의 실현을 주장하는 '''새로운 사상'''이 대두되었다. → 소수설이다. [[최치원]]의 [[골품제]] 비판 의식부터 한계가 있었으며, 새로운 유교정치는 신라시대에 대두된 적이 없다. 유교정치는 조선시대에서야 이뤄졌다는 것을 생각해보자(다만 정치체계의 정비는 유교의 영향이 있음이 분명하다). 애초에 신라 하대의 [[6두품]]은 중앙집권적인 것이 아니라 호족과 연결되면서 지방분권적 성향이 강하게 등장하며, 이걸 순수하게 유교의 정치 이념화로 본다고 하면 학계의 대세는 [[신문왕]] 시기이므로 신라하대라고 볼 수 없다. >(고려시대의) 이부=관리의 인사, 병부=군사 → 고려시대의 이부가 담당한 인사는 '''문관'''뿐이다. 무관의 인사는 병부가 담당했다. >(서경반란에) 차별에 불만을 품은 서북 지방의 농민이 호응하였으나 → [[묘청]]의 서경반란 장면인데, 고려시대에 '''서북지방민의 차별은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남북조시대 이후 폐허가 된 평양을 재건한 것도 고려왕조이다. 조선시대의 서북지방 차별을 고려에도 획일적으로 적용한 구문. >최승로의 상소문을 인용하여 중국중심의 천하관이라고 설명 → [[최승로]] 시기는 중국중심의 사대적 천하관이 유입되던 시기가 아니다. 오히려 [[수능]], [[공무원 시험]],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등을 준비하면서 시무 28조 사료를 공부한 사람들이면 알겠지만 최승로는 '''유교의 도리는 본받더라도 의복과 같은 풍속은 고려의 것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게 각종 시험에 더 자주 나온다. >일부 조창에서는 전쟁과 재난에 대비하여 곡식을 비축하였다. → 근거가 없다. >향리 출신으로 중앙의 권력자와 줄이 닿지 않았던 이규보는 → [[이규보]]의 부친은 이미 호부 낭중을 역임한 중앙 관료였고, 이규보 본인도 최씨정권의 비호를 강하게 받아 순탄한 관직생활을 했다. 이규보가 권력자와 줄이 닿지 않았다면 그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이 최우의 책임하에 간행된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향도는 종교행사 외에도 제방을 쌓는 등 마을 공동 작업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 향도의 역할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한 내용. 향도가 제방을 축조한 흔적은 없다. >고려는 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1125년) → 고려는 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적이 없다. 처음 금이 형제의 맹약을 맺고 했을 때는 묵살하였고, 이후에 [[이자겸]]이 맺은 것은 사대의 맹약이다. 그리고 형제의 맹약을 맺자는 제의가 온 것은 1117년이고, 사대관계가 형성된 것은 1126년. >조선초기 역사 서술에서 편년체를 왕권강화적 입장, 기전체를 신권 강화적 입장이라고 서술. → 역사 서술 방법은 역사서 편찬자의 의도와 아무 상관 없다. 오히려 본기와 세가를 사용할 수 있는 기전체가 왕의 활약을 대놓고 언급할 수 있기 때문에 세종은 오히려 고려사를 편찬할 때 기전체 사용을 선호했고, 신하들은 고려사절요에서 편년체 사용을 선호했다. >강원도에는 대동법을 반대하는 이가 없다고 서술하다가 다른 곳에서는 대토지를 소유한 토호들이 충청도와 '''강원도'''에 존재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반발로 대동법이 잘 시행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 이랬다가 저랬다가 모순되는 서술을 하고 있다. >이양법은 모내기할 때 줄을 맞추어서 심기 때문에 벼와 잡초가 쉽게 구별이 되어서 김매기를 쉽게 할 수 있었다 → 줄을 맞추어서 모내기를 하는 것은 '''일제강점기'''에 처음 시작되었다. 직파법과 비교할 때 이앙법이 김매기가 더 수월하다는 것은 맞는 얘기이긴 하나... 물론 역사 [[학습만화]] 등에도 줄맞춰서 모내기를 심는다는 식의 잘못된 묘사가 자주 등장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